(증심사 산책) 7.석조관세음보살상이라 불러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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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증심사 댓글 0건 조회 796회 작성일 19-09-2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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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관세음보살상이라 불러주오

석조보살입상이 증심사에 처음 모셔졌을 때 위치는 오백전 왼쪽, 그러니까 7층 석탑의 옆자리였다. 그런데 2003년 오백전 건물을 보수하면서 대웅전 오른쪽에 새 집을 지어 모셨다. 전각 이름은 원통전(관음전)이다. 우선 이 보살님 겉모습부터 한 번 살펴보자.

 

1. 재료 : 짙은 암회색 화강암

2. 전체 크기 : 2미터 70센티미터

3. 보살상 크기 : 2미터 12센티미터

4. 얼굴 모습 : 무표정하며 눈썹이 예리하고, 눈꼬리는 힘 있게 치켜세워짐. 위 콧등은 좁고, 아래쪽은 넓으며, 콧날의 높이가 알맞음.어깨 위까지 내려온 큰 귀와 두툼한 입술이 특징.

5. 입고 있는 옷 : 가슴 위쪽에 반원형의 두 겹 옷자락이 지나감. 옷은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발등까지 내려와 발이 거의 보이지 않음.

6. 손 모양 : 오른쪽 손은 무릎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렸으며, 왼손은 앙 가슴에 대고 있는데 구부린 채 약간 벌리고 있음.

7. 뒷모습 : 희미한 옷자락이 보임.

8. 받침대 : 58센티미터의 원형 돌로 연꽃잎 문양이 새겨져 있음.

9. 신체적 특징 : 40센티미터의 비교적 큰 둥근 관을 쓰고 있는데 이 관에는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음. 배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음.

10. 그 밖의 것 : 목에 삼도주1)가 새겨져 있음.

 

나한님누구세요?

그럼 나한이란 대체 뭘까궁금증부터 풀어보자간단하게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수행자이다석가모니 부처님의 직계제자 가운데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16명의 제자가 으뜸 아라한이다그리고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경전을 만들기 위해 모인 500명의 제자가 버금 아라한이다이름 하여 오백아라한 이다부처와 보살 중에는 실존하지 않았던 이들도 있었으나 나한은 대개 실존인물이라는 점이 다르다.

나한이 신앙의 대상으로 발전한 곳은 중국이었다선종이 유행하면서 인도의 수행자였던 나한이 깨달음의 역할 모델로 인기를 누려 16나한, 500나한, 1200나한 등으로 발전하였다.

고려 초 양나라에서 사신이 500나한상을 가지고 귀국 해 해주 숭산사에 모시면서 우리나라에도 나한 신앙이 꽃을 피웠다왕실에서 28차례나 나한재를 열었다고 하는데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우제 성격이 가장 강했다고 한다그리고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터라 어려운 국난 극복의 염원과 왕의 장수를 바라는 행사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왕실에서 나한상을 조성하고 나한전을 건립해 발원자의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을 기원했다고 한다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를 염원하는 뜻도 담겨 있었다 한다.

 

그대 이름은 관세음보살

이 보살상은 광주광역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예술성이 빼어난 유물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적인 가치는 충분한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석조보살입상. 어떤 보살을 조각한 것일까? 돌로 만든 서 있는 보살상이라는 말일뿐 구체적으로 어떤 보살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관세음보살이다. 이 보살상이 쓰고 있는 관에 새겨진 화불化佛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관무량수경관음관편에 보면 관세음보살의 머리 위에는 마니보주로 된 천관이 있고 그 천관 속에는 화불 한 분이 서 계신다는 구절이 있다.

이로 미루어 관세음보살이라 짐작되는 것이다. 만약에 이 보살상이 처음부터 증심사에서 조성 되었다면 석조관세음보살상이라 불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 전에 조성 되어 있던 것이 증심사로 옮겨지다 보니 제 이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진 채 불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관세음보살은 주로 아미타불 곁을 지키는 협시로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증심사 보살상은 독립된 공간의 본존불로서 봉안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밖에도 특이한 것은 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보살상이 분명한데 옷차림이 부처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관세음보살이 부처의 몸으로 중생을 제도할 때 부처 모습으로 나타나 법을 설한다법화경구절을 설명이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증심사, 대황사와 아름다운 공존

이 보살상은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조성한 작품으로 보인다. 머리 위에 쓴 관의 양식이나 배가 유난히 튀어나온 점, 그리고 오른손이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점으로 미루어 제작 연대를 그리 짐작하고 있다.

이 보살상이 처음부터 증심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담양의 서봉사와 옛 도청 근처의 대황사에 있던 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대황사에 있던 것을 증심사로 모셔온 것으로 보인다. 이미 폐사지로 변해버린 서봉사에는 옛 건물터에 주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화강암이 붉은 황토색을 띄고 있어 약간 검은 암회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보살상과는 이질감을 준다.

반면에 대황사가 있던 옛 도청 주변에는 지금도 석등과 탑의 옥개석 일부가 남아 있는데 이 화강암이 보살상과 유사한 화강암의 재질과 빛깔을 갖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1930년대 초에 대황사가 폐사지가 되면서 그곳에 있던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7층석탑, 그리고 이 보살상까지 증심사로 옮겼다고 한다.

고려 초까지도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대황사가 어떤 이유로 폐사지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오랜 유물로 인해 대황사의 역사는 증심사의 역사와 함께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1) 삼도: 생사를 윤회하는 인과를 나타내며 혹도惑道 번뇌도煩惱道 업도業道 고도苦道를 의미한다. 이를 불상에서는 목에 3개의 선을 음각하는 형식으로 나타낸다.원만하고 광대한 불신佛身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형식으로 불상과 보살상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불상에서부터 나타난다.

 

무등산박선홍 저 / 광주 증심사 석조보살입상에 대한 고찰성춘경 논문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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