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심사 산책) 1. 온갖 것 품어안고 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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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59회 작성일 19-02-12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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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글을 연재합니다. 우리의 사랑, 증심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200년 가까운 역사를 간직한 증심사. 사람의 한 세대를 30년이라고 했을 때 증심사는 40세대의 할아버지 세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결코, 녹록지 않은세월 증심사는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정말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환희로운 순간도 있었을 것이고 애끓는 고통의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담장 위에 올려진 돌멩이 하나도 그냥 무심한 돌멩이는 아닐 것입니다. 증심사 어느 시점의 이야기를 침묵으로 지켜보았을 역사 속의 유산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증심사 이야기를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오늘의 증심사가 있기까지 증심사라는 공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차근차근해볼까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증심사가 가슴속에 더 큰 사랑으로 자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가지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훗날 증심사의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편집자 >

 

하나 - 네 이름 왜 무등산인고?

광주 하면 사람들은 무등산을 떠올린다. 무등산 하면 다시 증심사를 생각한다. 증심사를 품은 산 무등산과 무등산의 중심인 증심사.

새의 좌우 날개처럼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증심사 이야기 첫머리에 무등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무등산의 옛 이름은 많다. 백제 이전에는 무돌, 무당산으로 불렸고, 통일신라 때는 무진악, 무악이라는 이름으로 가졌다.

그러다 고려 때 서석산이라는 별칭과 함께 무등산으로 불린 것으로 짐작이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이름은 무당산이다. 많고 많은 이름 중에서 하필 무당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증심사 뒤편에 무당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었다. 오색 깃발 나부끼는 무당들의 움막이 군데군데 있었고 가끔 무당들의 굿판이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이 산이 무당들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은 아닌 듯하다. 불교가 유래되기 전 우리 민족 고유의 당산신앙이 있었는데 사람들 사이에 이 산이 큰당산역할을 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무당산神山으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의 이름 무등산은 무돌’ ‘무진에서 어원을 찾는다. ‘무돌은 물을 막는 제방인 물둑또는 무지개를 뿜는 돌에서 연유했다는 설이 있다.

무진은 광주의 옛 이름으로 광주의 진산이니 그 이름을 따 무진악이라 했다가 뒷날 무등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부처님은 세간의 모든 중생과 같지 않으므로 무등(無等)한 것이요, 부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서 견줄 이가 없기에 무등등(無等等)하다는 뜻에서 유래하여 무등산이라 명명했다고도 한다. 어느 말이 참이든 간에 한때 84천 암자를 거느렸다는 무등산이고 보면 불교와 인연만은 지중했던 듯하다


- 무등산이 쓴 역사

광주의 산증인 무등산은 광주 역사의 영광과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백제 때 무등산에는 성이 있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군사와 왕건의 군사가 이 성을 사이에 두고 싸웠다. 왕건은 몇 차례 참패 끝에 견훤의 군사를 항복시키고 고려를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왕건의 군사에게 몇 번의 실패를 안겨준 것은 무등산이 난공불락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고려 때에는 몽골군과왜군의 침입이 잦았다. 1381(우왕 7)에는 지리산 전투에서 진 왜군들이 무등산 규봉암 바윗돌 사이에 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숨어들었다. 그곳은 3면이 절벽인 데다 비탈길을 통해 겨우 한 사람이 오갈 수 있었다. 전라도 도순문사는 군사 1백 명을 이끌고 높은 곳에 올라가 돌을 굴리고 불화살을 쏘아 적들을 몰아붙이니 대부분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 무등산은 의병활동의 무대였다. 의병과 일본군의 수많은 접전이 있었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이들의 은신처였으며 비밀집회 장소이기도 했다.

특히 3.1운동, 학생 독립운동비밀집회 장소였으며 192885일에 열릴 예정이었던 전남소년연맹 창립대회가 일본 경찰에 의해 열리지 못하자 광주에 모인 지방대표 60여 명이 증심사로 장소를 옮겨 집회를 열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밤 11시경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아 40여 명이 잡혀가고 말았다.

일제 말 무등산이 황폐화된 것은 일본이 부족한 군수용 목재를 베어 간데다 비행기의 대체기름을 얻기 위해 다년생 적송을 뿌리째 캐갔기 때문이다.

이후 벌어진 한국전쟁은 무등산에 결정적인 상처를 안겨주었다. 증심사 원효사 규봉암 등의 사찰을 대부분 불태워버린 것이다. 특히 빨치산의 은신처가 되면서 무등산은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산수동과 원효사를 잇는 길이 놓인 것도 빨치산을 전멸시키는 작전에 필요해서였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무등산은 묵묵히 그 자리에 있었다. 슬픈 얼굴로 쳐다보면 다순 햇살 같은 품으로 다독여 주, 마음이 들떠 웃는 낯으로 쳐다보면 제가 먼저 환한 미소를 건네준다. 그래서 광주 사람들은 무등산에서 위로를 받는다. 무등산이 그냥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광주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살아있는 커다란 유정물이다.

무등산이 그리 넉넉한 품을 가질 수 있는 건 아픔도 상처도 슬픔도 다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삶의 그늘을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일 것이다.

무등산의 역사와 함께 한 증심사 또한 사람들 마음에 안식을 주며 오늘을 살고 있다.

박선홍 님의 [무등산] 책을 참고하였습니다.

_ 서관순(자유기고가)

tip- 백과사전에서 찾은 무등산

위치 : 광주시, 화순군 이서면, 담양군 남면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 1187m

주봉오리 : 천왕봉

면적 : 30.23

문화재 : 증심사 원효사 약사암 등

식물 : 897종 분포

기타 : 1972년 도립공원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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