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심사 산책) 10. "증심사 범종, 부도,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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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증심사 댓글 0건 조회 49회 작성일 21-07-20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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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음성 소리 실어나르는

범종소리 울려퍼지고...


무릇 지극한 도道는 형상 밖의 모든 것을 포함하나니

눈으로 보아도 능히 그 근원을 보지 못하고,

장중한 소리 천지간에 진동하여도 그 소리 듣지 못하는 도다.

이러한 까닭에 가설을 세워 오묘한 이치 보게 하듯이

신종神鍾을 걸어 부처의 음성 깨닫게 하노라.


굳이 ‘성덕대왕신종’의 글귀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범종의 소리는 부처의 음성이다. 부처의 말씀을 글로 표현하면 불경이 되고, 부처의 모습을 빚어놓으면 불상이 되고, 부처의 깨달음을 그림으로 그리면 만다라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의 음성은 범종의 몸에 실려 사람 사는 골골마다 울려 퍼진다. 

열린 귀와 마음만 있으면 범종의 울림 속에 깃든 부처의 생생한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절마다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하며 범종을 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세상에 깃든 모든 생명들 그 종소리 듣고 거룩한 부처되라는 간절함 싣고 땅속 깊이까지 퍼져나간다. 하루에 한 번으로는 부족해서 두 번 울린다.


운판 목어 법고는 어디 가고 범종만 남았는가

증심사 범종각에 자리한 지금의 종은 1983년에 영조스님이 주지로 오면서 만들어 내단 것이다. 이전 주지 스님이 신도들로부터 종불사 명목으로 불사금을 받아 종 만드는 회사와 계약까지 해놓은 상태에서 소임을 그만 두게 되었다. 여차하면 없었던 일이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종이 만들어질 날만을 기다리는 신도들과 약속을 어길 수 없어 영조 스님은 서둘러 종을 주조했다. 동 600근 (360킬로그램)을 녹여 종을 만들고, 다음 해에 목수 이광규로 하여금 범종각을 짓도록 했다. 

증심사 범종은 원래 취백루에 자리하고 있었다. 취백루 2층은 예불 때 필요한 사물(목어 운판 범종 법고)의 집이였다. 지난 호에서 이야기했듯이 취백루는 정유재란(1597년)때와 한국전쟁 때인 1951년에 두 차례 불에 타는 비운을 맞았다. 정유재란 때도 취백루와 함께 범종이 불에 탔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화마 속에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경진년 오월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300근(180킬로그램)짜리 큰 종을 단다’는 글씨가 새겨진 범종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경진년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정황으로 미루어 1700년(숙종 26년) 때로 짐작하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유곽乳廓(주1), 9개의 유두乳頭(주2)가 돋음새김 되었으며, 종의 밑부분에는 국화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또 중앙 부분에는 서 있는 보살이 앞뒤로 조각된 종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화재로 값진 유물을 잃는 일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부도 앞에서 그냥 웃지요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곳이다. 불탑이 주로 절 안에 있다면 부도는 대부분 절 밖에 자리하고 있다. 부도가 세워지게 된 것은 신라 말에 전해진 선종과 깊은 관계가 있다. 선종을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이 곧 부처이고, 평상심이 도道’라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깨달은 스님의 죽음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죽음과 진배없어 불탑에 준한 부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증심사 들머리 일주문 근처에 비석 17기와 석탑 2기, 그리고 부도 2기가 어우러진 비전碑殿이 있다. 이중 부도 2기는 ‘수월당 부도’ ‘월암당 부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수월당 부도’는 ‘수월당보문’이라 새겨진 글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조각 기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으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재미있는 것은 기단부를 받치고 있는 거북모양의 조형물이 파격적이라는 점이다. 한 발 내딛을 것처럼 힘찬 모습의 거북모양이 일반적인데 반해 그 모습을 단순화 시킨데다 왼쪽으로 고개를 약간 꼬아 민화속의 거북이를 보는 듯 해학적인 느낌이다. 

‘월암당 부도’는 ‘월암당대사민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부도로 뒷면에 ‘강희 56년 을미 5월에 세움’이라 쓰여 있다. 조선 숙종 때인 1715년임을 알 수 있다. 이 스님에 대한 정확한 행적은 역시 알 수 없다. 하지만 증심사 유물 가운데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로서 그 가치가 높다하겠다. 


산자락을 살려 건립한 산신각

산신각은 누각형식을 빌리고 있는데, 전각의 일부를 산허리에 걸치고 있다. 원래 산신각은 현재 보다 위에 소규모 석조 전각으로 지어졌으나 제대로 된 기도공간이 없어 2004년 현재 자리에 지었다. 산신각 주위를 둘러보면 암벽에 음각된 ‘서석산신지위瑞石山神之位’라는 명문을 찾아볼 수 있다. 산을 허물지 않고 알뜰하게 지은 산신각은 후대 증심사의 명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주1) 유곽 : 종의 위부분에 네모난 태가 있는데 이것을 이르는 말이다.

주2) 유두 : 유곽 안에 볼록하게 솟은 9개의 꼭지가 있는데 마치 젖꼭지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불교길라잡이] 곽철환, [무등산] 박선홍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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