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심사 산책) 11. "증심사 연재를 마치며 - 명사들이 남긴 증심사 기록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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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증심사 댓글 0건 조회 45회 작성일 21-07-20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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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심사,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때 나는 돈이 필요했다. 10만원 정도라면 체면치레 하는데 부족함 없는 액수라고 생각했다. 그 돈을 받기 위해 증심사에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빌려준 돈 받으러 가는 길도 아니고 보니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스님, 저희 초파일 행사하는데 권선하러 왔습니다.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입 속으로 수없이 되내인 말을 주지스님 앞에서 당당하게 내뱉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증심사는 이미 내게 할당된 사찰이었으니 결과와 상관없이 발을 들여놓아야만 했다. 대웅전을 마주 하고 섰는데 대중방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한 무리의 청년들이 연등을 만들고 있었다. 주지 영조스님도 그들 속에서 연등을 만들고 계셨다. 

‘곧장 주지스님 계신 곳으로 가서 스님! 하고 부르면 스님이 쳐다보겠지? 그러면 우선 삼배부터 드리고 대학생불교연합회에서 초파일 준비 때문에 도와주십사 뵈러 왔습니다. 살짝 웃으면서 그렇게 일사천리로 말해야지.’ 이미 짜놓은 각본을 머리 속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하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런데 발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대웅전으로 향했고 그곳에 엎드려 삼배를 하고 있었다. 

대중방 앞에서 머뭇거리다 들어가며 청년회원인 척 연등이나 만들다 와야겠다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사주팔자에 없는 ‘돈 내놓으라.’는 말은 입맛에 맞는 말이 아니었다. 

“우리 청년회 회원인가?”

주지스님 그 한 마디가 권선의 끈을 다시 이어줄 줄이야! 

“저는 대불련 광주지부장인데요. 스님이 좀 도와주셨으면 해서......”

끝을 맺지는 못했지만 방문의 목적은 전달한 셈이었다. 스님은 선뜻 봉투 한 개를 내 앞에 내놓으셨다. 쭈뼛거리다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나는 청년회 법우들 사이에 끼어 연등을 만들었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개밥의 도토리마냥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어둑발이 내릴 때까지 손가락에 빨간 물들이며 연등을 만들었다. 

증심사 하면 20여 년 전 그때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젊다는 특권 하나 가지고 버텼던 그 시절, 지지리 못났던 나는 절에 권선 갈 때마다 진땀이 나곤 했다. 

“우리가 니네 행사 하는데 왜 돈을 주냐!” 

문전박대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해서일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봉투를 내주셨던 주지 스님 그 속 깊은 마음이 지금도 감사하다. 

증심사 역사에 견주어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남겨놓은 기록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물론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 궁색한 변명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흔적들 중 그리 오래되지 않는 글 몇 편을 골라 함께 읽어볼까 한다. 


『심춘순례』 (최남선)

...... 이 증심證心은 본래 징심澄心이라 한다. 예로부터 이름 있는 절이다. 지금은 선암사의 유력한 말사 중 하나로 청호 노스님의 상좌인 박춘광 스님이 주지이다...... 대웅전에는 홍지紅地에 금박을 한 후불탱화가 볼만하다. 그 앞 뜰에 탑이 퍽 많이 서 있으나 오백전 앞의 오층탑 하나만 좀 볼만하다. 비로전 앞에 있는 탑은 아래층에 사변에 십자十字를 새긴 문자가 주의를 끌었다. 경내에 수북하게 많이 있는 탑비는 대개 돌에 이름이나 한 번 새겨보려는 공덕주의 것이었다. (이하 생략)


<육당 최남선 전집>에 나와 있는 『심춘순례』를 쉽게 풀어썼다. 이 책은 1925년부터 50여 일간 지리산 주변 각지를 여행한 뒤 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 펴낸 것이다. 33편의 기행문 중 무등산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증심사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탑과 부도, 비석 등의 위치만 다를 뿐 지금과 크게 달라진 것 없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증심사에 살았던 주지 스님 법명이 나와 이 스님의 행적을 찾다보면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발견할 수도 있겠다.


『절을 찾아서』 (고은)

......대웅전. 그 대웅전의 지붕에는 더러 질긴 잡초 포기들이 돋아 있는 것도 있다. 그런 퇴락한 광경을 흉흉한 흉가로 보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잘 가꾸어진 여승의 절 마당이 물을 뿌린 것 같은 청결감을 주는 반면, 이런 절의 으스스한 남성적 분위기는 이것대로 반가운 바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지나가는 운수납자가 눈여겨서 뽑아낼 것이다.

“스님, 이 절에서 나신 큰스님들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런 것 몰라요. 소승이야 그냥 이 도량이나 지키고 있는 셈이니께......”

“저 대웅전 앞 오층석탑은 대좌가 튀어 있군요. 탑신도 어긋나고 있어요. 저쪽 삼층탑은 괜찮은데......”

“그것도 몰라요. 그냥 두었다가 쓰러지면 누가 세우거나 말거나......”

“스님, 초연하시군요.”

“초연할까요? 이 세상을 다 맡아서 살 수 없고, 한 군데를 맡아서 살기도 어려워요. 보시다시피 소승의 몸도 이렇게 어긋나고 벗어나서 곧 무너질 지경 아닌가요? 초연하지 않고 적연寂然할 뿐이오.”(이하 생략)

한 때 수행자로 살았던 시인은 젊은 날 바람처럼 떠돌다 피안의 절을 찾는다. 그리고 40곳이 넘는 절 이야기를 1987년 책으로 묶어낸다. 증심사에서 만난 스님과 나눈 이야기가 쓸쓸한듯 하지만 다분히 선적禪的이다. 당시 고즈넉했던 증심사를 보는 듯하다.


『이 세상 다녀가는 것 가운데 바람 아닌 것이 있으랴.』 (한승원)

...... 당시 증심사는 비구승과 대처승의 분규로 전 주지가 계림동 사택으로 가버리고 없었다. 우리는 결혼식 한 달 전에 그 대처승인 주지와 약속을 했었는데 그 주지는 사택으로 가면서 새 주지에게 우리의 결혼식 문제를 인계하지 않았던 것이다...... 절에는 나이 지긋한 보살 둘과 세 사람의 젊은 비구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재빨리 우리 일행을 요사채로 모시고 차를 대접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혼례식 준비를 서둘렀다. 신부는 왼쪽 문으로 들어가고 신랑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갔다. 

법당 안으로 내디딘 첫발 앞에는 하얀 베가 강물처럼 기다랗게 깔려 있었다. 신랑 신부는 그 강물을 밟고 나아가 단 앞에 섰다. 새파랗게 젊은 비구승이 책을 펼쳐놓고 떨리는 목소리로 주례사를 읽어 내려갔다.

“지나는 길에 옷자락을 한 번만 스쳐도 전생에 오백승의 인연이 있다 하는데 하물며 백년해로를 하려는 오늘의 신랑 신부는......”

그 주례사를 나는 지금도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다. (이하 생략)


상상해보라. 결혼은 절에서 해야 한다며 한사코 우겨 달랑 8명의 하객과 함께 절에 당도했는데 그 사이 주지 스님이 바뀌어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결혼식 광경을 말이다. 주례사인 젊은 스님도 떨고, 신랑 신부도 낯설고, 하객들도 어색했을 40년 전의 결혼식 모습을 말이다.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이야기이다. 

한승원 선생의 이 글 덕에 나는 증심사가 살가워졌다. 

긴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사찰이 이 글로 인해 비로소 사람의 온기가 감도는 도량이 된 듯 싶어서이다. 

‘사랑해요 증심사’ 이야기가 문화유산 중심의 이야기여서 솔직히 아쉬웠다. 그것으로도 의미 있지만 그것과 더불어 사람 이야기가 얹어졌을 때 역사의 유적이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재 마지막을 결혼식 이야기로 마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글 _ 서관순(자유기고가) 

‘사랑해요 증심사’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마음 내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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